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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역사 속 전설 페라리 레이싱 팀의 모든 이야기

📑 목차

     

    포뮬러 원에서 페라리를 빼놓고느 이야기 하기는 많이 아쉽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 페라리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전설적인 드라이버도 많이 배출한 팀이고 공도에서 돌아 다니는 차 역시 정말 멋진 퍼포먼스로 만들어내는 페라리. 

    F1의 역사를 거의 같이 했다해도 과언이 아닌 그 페라리 팀을 이야기 해보겠다. 이번 포스팅 역시 최대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작성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오류가 있을수 있으니 그점을 감안하여 포스팅을 읽어주기를 바라며 이 포스팅 역시 재미로 읽는 다면 한결 편하게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이 된다. 

     

    F1 역사 속 전설 페라리 레이싱 팀의 모든 이야기

     

    1) “F1과 함께 태어난 팀” 페라리의 출발(1950~1960년대)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는 F1 월드챔피언십이 시작된 초창기부터 “공장(Works) 팀”으로 꾸준히 참가해 온 거의 유일한 존재다. 페라리의 F1 공식 데뷔는 1950년 5월 21일 모나코 그랑프리로, 엔초 페라리는 125 F1 머신 3대를 출전시키며 새로운 무대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이때부터 페라리는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라, F1의 정체성 자체를 상징하는 “상수(常數)”로 자리 잡는다. 팀 컬러 ‘로쏘 코르사(이탈리아 레이싱 레드)’는 이후 수십 년 동안 페라리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아이콘이 된다. 페라리의 초기 강점은 엔진과 섀시를 모두 자체 개발하는 ‘완성차 제조사 팀’의 일체형 개발 체계였다. 당시 F1은 규정이 지금보다 단순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구성·구동계·차체 밸런스 등 “기계적 완성도”가 성적을 좌우했다. 페라리는 이런 환경에서 빠르게 우승 경쟁력을 확보했고, 1950년대~1960년대에 걸쳐 월드 챔피언을 다수 배출하며 팀의 위상을 굳혔다(예: 알베르토 아스카리, 후안 마누엘 판지오, 마이크 호손, 필 힐, 존 서티스 등). 특히 이 시기는 “페라리가 F1에서 어떤 팀인가”를 결정지은 시기로, 단발성 성공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누적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2) 규정 변화 속에서의 부침과 재도약의 패턴(1960년대 후반~1970년대)

    F1은 기술 규정이 바뀔 때마다 권력 지형이 흔들리는 스포츠다. 엔진 배기량, 공기역학, 타이어, 연료 규정 등 환경이 바뀌면 강팀도 한순간에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페라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F1은 공기역학적 개념과 섀시 철학이 급속히 발전했고, 영국을 중심으로 한 ‘가벼운 섀시 + 강력한 엔진’의 조합이 대세가 되면서 페라리도 적응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페라리는 위기를 “장기 프로젝트”로 돌파하는 데 강했다. 1970년대 중반 니키 라우다 체제는 그 대표 사례로, 라우다는 1975년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하고(1976년의 큰 사고를 겪은 뒤에도) 1977년에 다시 정상에 오르며 팀을 전성기로 이끌었다.   이어 1979년 조디 셱터가 챔피언을 차지하면서 페라리는 1970년대 후반의 대표 강팀으로 각인된다. f 이 시기 페라리의 의미는 단지 “우승”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적 격변기에도 조직이 방향을 잡으면 다시 정상으로 올라올 수 있다는 팀 운영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F1은 드라이버만으로 이길 수 없고, 설계·전략·정비·팀 문화가 합쳐져야 한다는 사실이 페라리의 부침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3) ‘가장 성공한 팀’이라는 숫자의 힘: 챔피언십과 기록

    페라리를 이야기할 때 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F1에서 팀의 진짜 ‘시대 지배력’을 보여주는 지표는 보통 컨스트럭터 챔피언십(팀 챔피언십)인데, 페라리는 이 부문 최다 우승(16회) 기록을 보유한 팀으로 널리 정리돼 있다.  또한 페라리는 드라이버 챔피언도 다수 배출했고(총 15회로 정리되는 경우가 일반적), 데뷔가 1950년 모나코 그랑프리라는 사실과 함께 “F1 역사에서 가장 오래, 가장 많이, 가장 꾸준히 우승해 온 팀”이라는 서사를 만든다. 우승 수치 역시 페라리가 왜 전설인지 설명해 준다. 통계 사이트들에서 집계되는 페라리의 그랑프리 우승 기록은 200회가 훌쩍 넘는 수준으로 관리되며, 어느 시대를 잘라 봐도 페라리는 ‘승리의 단위’로 기록되는 팀이었다.  다만 이 기록의 진짜 가치는 “한 번의 황금기”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1950년대의 기계적 완성도 경쟁, 1970년대의 섀시·공력 진화, 2000년대의 데이터·전략 경쟁, 하이브리드 시대의 에너지 관리까지—페라리는 서로 다른 규정과 서로 다른 경쟁 구조에서 승리를 쌓아 왔다. 그래서 페라리를 설명할 때 흔히 “팀이 곧 역사”라는 말이 성립한다.

    4) 슈마허 시대의 시스템 혁명과 2000년대 지배(1990년대 후반~2000년대)

    페라리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구간 중 하나는 2000년대 초반이다. 이 시기는 ‘스타 드라이버가 팀을 바꿨다’기보다, 팀이 시스템으로 우승을 반복 생산한 시대에 가깝다. 페라리는 1999년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시작으로, 2000~2004년에 미하엘 슈마허가 드라이버 챔피언을 연속으로 차지하며 최정점에 올랐다.  여기서 핵심은 “반복 가능한 승리”였다. 단 한 대의 빠른 차가 아니라, 시즌 내내 업그레이드가 끊기지 않는 개발 속도, 피트스톱 실수율을 낮추는 운영, 레이스 운영에서 타이어와 연료를 조합하는 전략 역량이 합쳐져 경쟁자를 질식시켰다. 당시 F1은 테스트와 개발 자유도가 지금보다 높았고, 그만큼 조직력과 자원 운영이 곧 성적이었다. 페라리는 이런 환경에서 ‘공장’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성적으로 바꿔냈다. 결과적으로 이 구간은 페라리가 “전통의 팀”을 넘어 “현대적 운영의 표준”이 되는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기준은 이후 모든 팀이 참고하는 일종의 교과서가 된다.

    5) 하이브리드 시대 이후의 도전, 그리고 페라리가 여전히 특별한 이유(2010년대~현재)

    2014년 이후 F1은 하이브리드 파워유닛 시대를 맞으며 기술의 중심축이 크게 이동했다. 엔진(내연기관)만이 아니라 전기 에너지 회수·배분, 열효율, 배터리·MGU 제어, 소프트웨어, 냉각 패키징까지 통합 능력이 성적을 결정했다. 이런 변화는 전통 강팀에도 “새로운 전문성”을 요구했고, 페라리도 그 격변 속에서 다시 한 번 긴 재구축의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페라리는 ‘우승 가능성’이 사라진 팀이 아니었다. 예컨대 2010년대 중후반 페라리는 꾸준히 우승을 기록했고, 특정 시즌에는 챔피언 경쟁을 장기간 이어가며 존재감을 증명했다(우승 집계와 연도별 승수는 여러 통계 아카이브에서 확인 가능).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페라리가 단순한 스포츠 팀이 아니라 문화 브랜드로서 F1의 생태계를 움직이는 중심축이라는 사실이다. 페라리는 F1 데뷔 자체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 있는 역사”이며, 컨스트럭터 최다 우승(16회) 같은 기록이 만들어내는 상징 자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페라리의 성적은 단순한 팀 성적표를 넘어, F1이라는 종목의 흥행·감정·전통을 함께 흔든다. 매 시즌 ‘페라리가 강해야 F1이 뜨겁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페라리의 역사는 규정 변화 → 적응의 시행착오 → 조직 재정비 → 재도약이라는 순환을 반복해 온 역사이며, 이 순환을 수십 년간 견딜 수 있는 팀은 거의 없다. 그 희소성이 바로 페라리를 F1에서 가장 특별한 팀으로 만든다.